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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의 원인과 전쟁과정
6.25전 남한의 사정 북한은 풍부한 수력 자원과 지하 자원 그리고 공업 시설이 많은 반면, 남한은 농업 중심, 소규모의 공업이 발달하였기에 북한에 의해 잦은 경제적 곤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우선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 건설과 새로 시작한 민주 정치를 빨리 뿌리 내리게 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애치슨 선언 이후 한국에 주둔 중인미국을 군사 고문단 500명만 남겨두고 본국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애치슨 선언과 6.25 전쟁과의 관계는 1960년 1월 12일 미국 국방부 장관인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묶은 선이며.한국은 이방위선에서 명백히 제외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그는 한국에 군사적 공격이 생겨도 먼저 공격받은 국민이 저항하고, 다음에는 국제 연합 헌장 밑에 전 세계가 조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런 침략,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의 도움을 받은 북한국이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했습니다. 당시 남한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군의 최고 책임자들은 금방이라도 적을 쳐부술 것이라고 큰소리를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미 피난을 떠나고 서울에 없던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된 목소리가 곧 적을 물리칠테니 안심하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 함락 북한군이 남쪽을 공격한지 하루 뒤인 27일 국군은 기습을 받아 서울을 3일만에 내주었지만 질서있는 후퇴를 했습니다. 비가 내리면 어둠이 가득한 한강에서 두번의 폭팔이 일어났고 한강 철교가 끊어졌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한강을 넘어 전쟁을 피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다리가 끊어지면서 1000여며이 사망했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군대도 발을 멈춰야 했습니다. 그 후 이 일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높은 사람의 명령에 따라 다리 폭파의 책임을 맡앗던 대령 한 명만이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1950년 7월 5일 미국과 북한과의 첫 교전 6월 30일 북한군은 3일간의 정적을 깨고 북한군이 다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한편, 29일 한국을 방문했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고 30일 트루만 대통령은 한국에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인 7월 1일 부산에 미국의 스미스 부대를 투입하였습니다. 스미스 부대는 나름대로 북한군에세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미스 부대는 대패하였습니다. 첫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540명의 부대원중 150명의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냈고 72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겨우 6시간동안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을 뿐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1950년 7월 20일 후퇴, 또 후퇴, 미국은 지상군을 투입하였고 유엔도 지원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전세는 분리하기만 하였습니다. 미국은 죽미령, 천안, 금강 방어선에서 게속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계속했었고, 대전마저 북한에게 내주었습니다. 1950년 7월 25일 낙동강 방어선, 금강전선과 대전이 함락당하고 병력이 거의 없었던 호남지방도 쉽게 북한군에 장악됐습니다. 대구에 있던 수도도 부산으로 긴급히 이전하였으며 대한 민국은 한반도의 끝에 위치한 부산을 중심으로 남북 135km 동서 90km라는 한 줌도 안되는 땅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당시 미 제8군 사령관은 낙동강을 따라서 방어선을 설정하고, 미국 장병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있는 곳도 없다 우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들 걸고 싸워야 한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UN군이 맥아더의 지후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UN군의 함천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 부재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서 끝이났습니다. 1950년 10월 26일 낮 2시 압록상, 중공군 26만 매복 모른채 전속진격, 한국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 꼭대기에 있는 압록강에 도착하였습니다. 곧이어 11월에는 동부전선의 미국도 압록강에 도착하였습니다. 압록강은 한반도의 북쪽끝에 있는 강으로 이 강의 반대편은 중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압록가에 그리 힘들이지 않고 올 수 있었습니다. 1950년 11월 2일 중국의 한국전 참전과 인해전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뛰어난 화력과 많은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동원해 밀고 내려오는 인해 전술을 쓰는 데는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인해의 공격 앞에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1950년 12월 5일 계속되는 후퇴, 1950년 12월 5일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첫 째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째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1.4 후퇴,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국군에세 38선까지 밀렸습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 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습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유엔 공군은 계속해서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해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보급원을 완전히 끊기 위해 북한의 공장지대와 주요 도시인 평양, 원산에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1월에는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수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국은 이에 맞서 2월에 대공격을 감행했지만 UN군은 이를 무사히 막아냈습니다. 휴전 때는 3월 15일로 UN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전세는 계속 UN군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전쟁이 유리해지자 UN의 휴전 압력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미국은 중국과 협상을 통해 휴전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